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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방공전의 스페셜리스트 - 요셉 캄후버 장군 by 음악사랑





# 초기 군 경력
요셉 캄후버(Josef Kammhuber : 1896. 8. 19~1986. 1. 25)는 독일 남부의 오버바이에른(Oberbayern) 지역 부르크 킬히엔 암 발트(현재의 Tüßling)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8살의 나이에군에 자원해바이에른 왕국군 공병 대대에 배속되었다.
1915년에 소위로 승진해 그 이듬해인1916년에는 베르덩 전투에 참전했으며, 패전 후에는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채용된다.
1923년 11월 9일 뮌헨 봉기가 있었을 때, 보병 제19 연대 동료였던 에두아르트디틀(Eduard Dietl)과 함께폭동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1925년 4월에는중위로 승진했고,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고 있던 독일 공군 육성 훈련에 참가해1931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캄후버 대위는 1933년까지는 국방부에서, 그리고 1939년까지 독일 제국항공성(RLM)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발터 베버(Walter Wever) 장군의 참모가 되어, 전략 폭격기 부대 창설에 골몰했으나, 1936년에 베버가 죽으면서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동안 1934년 10월에 소령, 1935년 3월에는 다시 항공병과로 옮겨1936년 10월 중령, 1939년 1월에는 대령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영국 공군이 항공기 증산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판명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600억 라이히스 마르크를 들인 항공기 생산 계획을 원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독일의 항공산업은 생산 수단도 원자재도 부족해이러한 증산은 불가능하다고공군 수뇌부는 결론을 내렸다.
한스 예쇼넥(Hans Jeschonnek), 유르겐 슈툼프(Hans-Jürgen Stumpff), 캄후버는보다 현실적인 200억 라이히스 마르크의 증산 계획을 세웠다.
곧이어, 당시 항공기 총감을 겸임하고 있던 에르하르트밀히(Erhard Milch : 1892~1972) 공군참모총장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참석한 회의에서 괴링은 어떻게든 히틀러의 계획을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이 회의를 통해 루프트바페의 모든 기종은이제 장래의 잠재적인 성능이나 전술에 대비하여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머릿수만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프랑스 침공 작전 당시 실전 출격에 나서는 요셉 캄후버 대령



# 2차 세계대전
일의 형편을 알아차린 캄후버는1939년 2월 생산 부대에 전속 소원을 제출하고 2차 세계 대전 발발을 앞두고 총동원령이 내려진 1939년 8월 제2 항공함대(사령관 헬무트 페르미)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1940년 1월 11일 메헬렌 사건(Mechelen incident : 벨기에 침공 직전 침공계획이 담긴 기밀서류를운반하던 Me108이 추락하여 누출되었다)의 책임을 추궁해히틀러는 그를참모장직에서 파면시켰다.
1940년 3월 캄후버는서부 전선에 전속되어, 전술 폭격부대인 제51 폭격 비행단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프랑스 침공 작전 중인1940년 6월 격추되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행하게도 곧 프랑스가 항복했고, 독일에 귀국하여 공군 참모부로 복귀했다.


이때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캄후버(1941년 9월)는 1940년 7월 1일자로 야간 전투 사단장에 임명되어대공포 레이다 시설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받았다.
독일의 방공 체재는그때까지만 해도지휘체계가 바로 잡히지 않아있었고, 보고나정보를 공유할 수없어서로의 요격수단과 귀중한 전투경험을 일원화할 수없었다.
캄후버는 이런 시기에 독일 상공의 방공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1940년 10월에는 소장 계급장을 달고1941년 9월에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했다.
한달 후인10월에는 45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XII 항공 군단의 지휘를 명령받아, 마침내 독일 전역의 야간 방공을 혼자서 지휘하게 되었다.
캄후버 중장의 방공사령부는 네덜란드 위트 레흐트 근교의 차이스트에 세워졌다.




로스톡 기지를 에른스트 하인켈과 함께 방문한 요셉 캄후버중장 (1942년 2월)



NJG.1 소속 야간전투기 파일럿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요셉 캄후버 중장 (1943년 1월)



# 연합군 폭격기들의 벽, 캄후버 라인(Kammhuber Line)


그는 "캄후버라인"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를 중첩시킨레이다 망을 새롭게 편성했다.
이 대공 방어선은덴마크에서 프랑스 중앙부까지 3중 레이어를 중복해 담당하도록 일련의 레이다 기지와야간 전투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기지는 남북 32 km, 동서 20 km의 범위를 담당하고, "힘멜베트(Himmelbett : 천장이 달린 침대)"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각 관제 센터는 유효 거리 약 100 km 플라이어를 레이다와 담당 구역(셀)에 배치된 몇 개의 서치라이트와 담당 지역에 할당된야간 전투기 1기와예비기체1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이다가 적기를 감지하면지시를 받은 탐조등은즉시 자동적으로 목표를 조명했다.
수동 탐조등이이에따라 밤하늘을 훑는동시에 스크램블 대기하던 야간 전투기가 출격하여적기를 요격했다.
각 레이다 기지에는뷔르츠부르크 레이다(Würzburg Radar) 2기가배치되었다.
이 레이다는 프레야(Freya Radar)가 담당하는 광역 레이다와는달리 고도를 정확하게 탐지하고, 복잡한 적기 추적이 가능했다.
뷔르츠부르크 레이다는 전투기 부대와 직결되어 목표가 탐지되면 즉시 요격을 위해 발진했다.
즉, 프레야 레이다가적기의 침입 진로를 경고하면, 그 지역에 할당된 뷔르츠부르크가 적기를 추적하는 구조였다.


이미 출격해 상공에 초계중인야간 전투기는 쌍방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적기를 목표로 고정지어 추적할수 있었다.
소수의 야간 전투기에는 슈파넬(Spanner)로 알려진 근거리​​ 암시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으나, 실전에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캄후버 라인과 힘멜베트 기지의배치



또한 캄후버는소위 원거리 요격부대인 II. / NJG 1(후에 I. / NJG 2로 개명)를 구상했다.
적의 폭격기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요격은 이륙과 착륙할 때공격하는 것이라는캄후버의평시 주장에 따른것이었다.
또한 폭격기 부대의 훈련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이어지는작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간주했다.
이 같은 전술은 모두 "적은 그 뿌리에서부터 끊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으며, 이로 인하여 야간 전투기 대원들은 캄후버 장군에게"뿌리 제프"라는 별명을 붙였다.
독일 통신수들은 영국 폭격기로부터 발신되는 무선 통신을 도청하고 공격의 징후를감지했다.
이 전술은1940년 7월 뒤셀도르프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스키폴 비행장에서도 준비를 갖추었다.
부대가 거둔 큰 전과에도불구하고 히틀러는 10월에 이 전술을 중단하고 부대를 지중해 전역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루프트바페의 공대공 레이다 관련리뷰 : http://blog.naver.com/naljava69/60105332810




# 영국 측의 대책
영국은 재빨리 치명적인 캄후버 라인의 위력을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한편,첩보 조직까지 동원하여정보를 모았다.
그때까지RAF폭격기 사령부는목표에 폭격기를 순차적으로 출격시켜 적의 요격을 분산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레이다 기지마다 2기 밖에 야간 전투기가 없는 독일 측에서 보자면 오히려 요격 임무에 걸리는 부담을줄여주는 꼴이 되었다.
영국의 첩보 관계자레지날드빅터 존스(R. V. Johnes)의 주장에 따라 RAF는다시 하나의 목표에 폭격기 대군을 보내는 폭격기의 강 전술로 되돌렸다.
이때 항로는 힘멜베트 한가운데를 통과하게 되었다.
상공을 폭격기 대군이통과하는레이다 기지는 배정된 약간의 요격기로는 손을 쓸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야간 전투기의 격추율은 급락했다.
또한 영국 측은 폭격기에서 대량의 채프(암호명 윈도우)를 뿌리는 것으로 독일 측의 레이다 판독을방해시켜폭격기의 침입을 식별 할 수 없게되었다.
이렇게 되자캄후버 장군은밀히와괴링 같은 공군 수뇌부의 이해 부족, 태만과 무책임에 대해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야간 에이스 베르너 슈트라이프(Werner Streib : 최종 격추수 66기)가 첫날 이전투기로 영국군 폭격기 5대를 격추시킨 다음, 열흘 동안 선행 양산형 He-219A-0는 무려 20대의 영국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게중에는 우리에게 언터처블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난적 모스키토가 6대나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러므로 이 신형기는속히 양산하여 어떤 야간 전투기보다 우선적으로 일선 부대에 배치할 것이 요구됩니다.
"


- 야간 전투기부대 사령관 요셉 캄후버 장군



"안되오. 지금은 무엇보다도 전술기들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오. 지금융커스사에서 개발중인 Ju-388이 이런 임무에는 더 적합할뿐만 아니라, 이 비행기는 고속 폭격기로도 쓸만하지. 반면에 하인켈에서 만들고 있는비행기는폭탄창조차 없는 전투기란 말이오. 내게 그런 압력을 가하려거든 냉큼 내 사무실에서 나가시오 장군."


- 독일 항공성 장관 겸 공군참모총장 에르하르트 밀히



영국 측의 대응책에 대해 캄후버는 다시 방어책을 고심하게 된다.
휘하 참모들과 연구한 결과, 캄후버는 "빌데자우(야생 멧돼지)","자메자우(길들인 돼지)"라는 두 가지 전술을새로운 카드로 뽑았다.
야생 멧돼지전술은 하요 헤르만(Hajo Hermann)의 제안으로주간 전투기로 구성된 제300 항공 전투단을 말하며, 조명탄과 탐조등의불빛을 이용하여 적기에 접근했다.
빌데 자우 부대최대의 전과는 1943년 8월 17일 페네뮨데 폭격에서패스파인더로 부대를 선도한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가베를린 상공에서 조명탄을 투하랄 때 시작되었다.
보통의 야간 전투기는 목표에서 멀면 너무 느리고 둔중해요격하지 못했지만 빌데 자우가 장비한Fw190 전투기는 요격에 성공했다.
약 30대의 도살새들이적 편대에 돌입해40대의 적기 중 29대를 격추했다.
하지만 빌데 자우 부대의전과는 날씨에 크게 좌우되며, 독일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자메자우는 레이다를 장비한 야간 전투기로, 기상 레이다로 적기의 침입에 대해 수백 ㎞ 거리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이 부대는지상 레이다 기지의 통신수를 통해서도적 폭격기 탐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자메자우 최대의 전과는 1944년 3월 31일 뉘른베르크에서 적의 4발 중폭격기 95기를 격추한것이었다.


캄후버는특별한 야간 전투기 개발에도 힘을 쏟아, 1942년 시험 비행을 참관한He 219 "우후"의 능력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밀히 장군은캄후버의의견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렸고 두 장군은대립했다.
1943년 1월, 캄후버는대장으로 승진했지만 그 직후인 11월에 노르웨이에 주둔하는 제5 항공 함대로좌천되었다.
이 부대는 배속된 기체도 적고, 그나마도 구식기들이 태반인 2선급 부대였다.
밀히가 실질적으로 실각한 후인 1945년 2월에야 히틀러는 캄후버를독일 본토로 불러들여"적 4발 폭격기 요격 특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패전을 두 달 남겨놓은 이 싯점에서 실질적인 요격대책은 거의 없어졌으며, 서류상의 부대만을 거느린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했다.





#전후의 저술활동
독일이 항복한 후 캄후버 장군은미군의 전쟁포로가 되었다.
미 국방부의 의뢰에 의해 독일의 방공전에 대한 서적을 많이 저술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정리되어"주야간 방공전에 대한독일 공군의 대처(Problems in the Conduct of a Day and Night Defensive Air War)"라는 한 권의 서적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이 발간된후, 캄후버는 후안 페론 정권의 아르헨티나 공군 육성을위탁받아 군사 고문관으로 재직했다.


1956년 6월, 서독의 재무장에 따라 캄후버는 독일 연방군 중장으로 임관하여, 국방부에서 공군의 지휘를 맡았다.
곧 공군 총감에 취임하여퇴역하는 1962년 9월까지 직위를 맡았다.
1961년에는 연방군 총감 중에서는유일하게대장으로 승진했다.
국방장관프란쯔 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와는 두터운신뢰를 나누던 관계였다.
서독 공군의 록히드 F-104의 채용은 캄후버의 반대 의견을물리치고 결정된 것이었다.
1980년 8월, 1940년 5월 10일 프라이부르크 공습에 대하여 군사 역사가와 가진인터뷰에서 "독일 공군의 III/KG51 전투단에 의해 프라이부르크가 오폭된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답변해 또 한번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캄후버는 1986년 89세의 나이로 뮌헨에서 사망했다.
독일 남서부에 있는 도시 칼스루에(Karlsruhe)의 비행장에는 캄후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막사가 있다.